Jane의 여행 일기장
[D398,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토레스 델 파이네 O트레킹(서킷) 5일차 본문
2.27
Los Perros ~ Grey 15km, 11시간 반, (Grey 산장 : 1인 only bed 35달러)
오늘 걷는 거리는 그동안 걸었던 평균보다 조금 더 긴데다가 코스 중 가장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서 11시간이 걸린다고 안내돼 있다. 중간 캠프인 Paso를 예약하지 못해서 이렇게 됐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았다. 이유는 나중에 Paso 캠프에 가보고 알 수 있었다.
어제 미리 아침과 점심까지 먹을 주먹밥을 싸둬서 새벽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니 아직도 깜깜한 밤하늘엔 별이 쏟아져 내린다. 급한 일정이 아니었다면 좀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아쉽게 잠깐 눈팅만~ 얼른 텐트와 짐을 싸고 5시 반에 출발했다.
헤드랜턴 만으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무에 칠해 둔 표식들이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선 눈에 잘 띄지 않아서다. 설상가상 오르막 길은 물이 고인 진흙길이라 이전 사람들이 높아둔 나무조각을 까치발로 찾아가며 걸어가자니 시간이 두 배로 걸렸다.
한 시간이 넘게 진흙길을 가다가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 걷기 조금 편한 자갈길이 나왔다. 그렇다고 쉬운 길은 아니었다. 오르막이 가팔라서 전혀 속도가 나지 않았다. 걷다 보니 뒤로 보이는 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트레킹 하며 보게 된 첫 일출인가? 뭔가 뿌듯함이 느껴진다.
자갈길이 위쪽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다. 바람이 너무 차서 손도 발도 너무 시려웠다. 해 뜨면 아침밥을 먹으려 했는데 도저히 이 추위에선 먹을 수 없었다. 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른다. 솜사탕 같은 구름, UFO 같은 구름.... 추위야 어쨌거나 풍경은 멋지다.
최고 지점처럼 보이는 곳까지 기를 쓰고 올랐는데 위를 쳐다보니 오르막이 또 있다. ㅜㅜ 도저히 걸을 힘이 없어서 아침밥을 먹기로 했다. 다행히 바람을 막아주는 큰 바위들이 있어 등을 기대 앉아 차가운 주먹밥을 먹었다. 그래도 꿀맛!
아래에 뒤늦게 출발한 사람들이 열심히 올라오고 있었다. 다리 긴 서양인들은 같이 출발해도 한 시간 이상 벌어질 정도로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체력도 동양인과는 급이 다르다.
밥을 먹으니 힘이 난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 정상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자 눈앞에 펼쳐진 그레이 빙하!! 이렇게 넓은 지대의 빙하를 멀지 않은 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앞서 온 연세 있는 그룹이 사진을 찍는데,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걸을 수 있을까 싶었다. 딕슨에서도 70세는 족히 넘었을 듯한 노부부를 봤는데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도 인증샷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호진이가 보인다! 앞서 가서 벌써 안 보인지가 한 시간인 것 같은데 왜 돌아왔지? 무슨 일이 있나 깜짝 놀랐다. 웃으며 여유 있게 걸어오더니 빙하 앞에서 같이 사진 찍으려고 기다리다가 금방 올 줄 알고 걸어온 게 여기까지 왔단다. 반가우면서도 놀랍네~
꼭지점을 찍었으니 이제 내리막. 한참을 내려가서 기다리던 재희를 만났다. 추운 바람 맞으며 오래 기다렸나보다. ^^;; 넷이, 둘이 사진 찍으며 농담도 해가며~ 함께 걷는 재미가 이런 거지~!
오르막도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 내리막이 더 힘들었다. 오르막 보다 가파른
내리막을 끝도 없이 내려가자니 도가니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그나마 스틱이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것도 없었다면 이미 내 무릎은 갈아 없어졌을 것 같다.
자갈길이 끝나고 숲으로 들어섰는데 힘든 와중에 예쁜 꽃들과 버섯, 이끼들 보는 게 그나마 즐거움이었다. 산길에 들어서서 한참을 내려왔으니 3km는 왔겠지 싶었는데 겨우 1km....ㅜㅜ 가도 가도 계속 내리막. 이정도로 올라온 것 같진 않은데...
12시 쯤 겨우 Paso에 도착했다. 내리막 중간에 만들어진 곳이라 사이트 자리도 별로 없었고 화장실도 재래식(하지만 냄새나거나 지저분하진 않았다). 모든 시설이 가장 열악했다. 왜 예약하는 게 하늘에 별따기인지 알 것 같았다. 캠프 자리가 20곳 밖에 없다고 한다. 무턱대고 와서 엉덩이 들이밀 자리도 없다. 예약이 힘든 캠프는 거의 이런 식이다.
점심 주먹밥을 먹으며 쉬는데 너무 지쳐서 입맛도 별로 없었다. 재희네는 오래 쉬지 않고 먼저 출발하고 우리는 30분 정도 쉬었다. 내가 느끼기에 남편은 이 때가 가장 힘들었는지 매우 예민했던 것 같다. 난 나중엔 체력이 바닥나서 마지막 날이 가장 힘들었다.
다시 출발! Grey까지 세 번의 흔들다리를 지나야 한다. 가는 내내 빙하를 옆에 끼고 걸어서 하루 종일 지겹게 보게 됐다. 그 덕에 나중에 모레노 빙하 투어는 접었다.
파소 캠프부터 시작된 길엔 나무들이 죄다 불타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나중에 그란데 캠프 리셉션에서 2012년 화재 때 소실된 지역의 지도를 봤는데 파소부터 시작되는 아래쪽 지역이 상당히 넓었다. 놀랍도록 넓은 지역이라 인간이 이 죄값을 얼마나 크게 받게 될까 무섭기까지 했다. 포르투갈에서도 300km에 달하는 거리가 테러에 의해 다 타버린 걸 보고 기겁을 했었다. 이런 환경파괴의 부메랑이 벌써 시작됐겠지만 어느 한순간 가속도가 붙어 걷잡을 수 없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세 번의 다리를 건널 때마다 대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흔들다리 밑으로 보이는 계곡이 엄청 깊다. 다리가 넘 길어서 건널 때마다 내 다리도 후들후들~
마지막 다리를 건너고 나니 완만한 숲길이 시작됐다. 기둥이 얇은 잔나무가 아니라 굵은 소나무 숲이라 우리나라 설악산 같이 정감 있었다.
5시가 거의 다 돼서야 캠프 푯말이 나왔다. 그 앞에서 이탈리아 커플이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자신들은 W코스를 걷는 중인데 우리가 O코스를 무거운 가방을 지고 걷는게 대단하다고 했다. 이 곳에서도 Ranger가 따로 예약증 확인 없이 통과했다.
Grey 산장은 Dickson 만큼의 시설이었지만 산 속에 있는지라 개인적으로도 탁 트인 Dickson이 더 좋은 것 같다. 근데 산장 시설은 Grey가 더 좋은 것 같다. 특히 레스토랑과 바가 제법 크고 인테리어도 멋있었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커서 좋았다.
산장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우리를 보고 먼저 도착한 호진이 반겨준다. 트레킹 시작 후 첨으로 이용하는 도미토리! 정말 천국이 따로 없다. 또 다시 깨달았지만 사는 게 참 별거 없다. 이렇게 내 몸 하나 뉘일 따뜻하고 포근한 침대만 있어도 세상 행복한 것을! 중반 정도 된 이 시점에서 산장을 잡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따뜻한 핫 샤워를 하고 곧장 저녁을 먹었다. 쏘세지 넣은 라면! 정말 꿀맛이었다. 저녁을 먹고선 바로 바에서 비싼 맥주 한 캔씩 마시며 다음 날 저녁 당번 훌라를 쳤다. 트레킹 고수가 된 느낌이다. 11시간을 걷고 여유있게 맥주에 훌라를 치다니...ㅋㅋ 재희네와 함께 한 덕인 것 같다. 둘이 있었으면 먹고 바로 골아 떨어졌을텐데...ㅋㅋ
훌라를 치면서 리셉션의 답변을 기다렸다. 내용인즉슨, Grey 산장 이후론 캠프 예약을 하나도 못해서 당일 취소된 자리가 있는지 다른 캠프장에 대신 알아봐주기로 했다. Grey는 W코스 캠프들과는 다른 회사지만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서 메신저로 서로 알아봐줄 수 있다고 했다. 저녁 8시쯤이면 취소된 자리를 정리한 후라 알 수 있단다.
9시에 답변을 받았다. 현재 자리가 가능한 곳은 가까이 있는 Paine Grande 뿐이라고. 원래는 더 걸어서 Italiano나 Cuernos에서 자야한다. 고심하다 우선 Paine Grande에서 하루 자고 다음 캠프는 다시 알아보기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Grande에서 페리를 타고 Central로 나가기로 했다.
캠프 자리도 문제지만 Ranger Station에서 예약증 없이 통과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예약증이 없어도 늦게 캠프에 도착한 사람들을 Ranger가 쫒아낼 순 없다는 게 규칙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엉덩이 들이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Paine Grande에서 예약증이 없어서 통과 못하면 바로 페리를 타기로 했다. 근데 예약증 검사는 Los Perros 이후로는 거의 하지 않았고 W코스는 더 널널하다고 들은 터라 Ranger Station 통과는 문제없을 듯. 관건은 중간 캠프에서 잘 수 있는지다.
이러나저러나 내일이 돼봐야 아는 법. 이 날은 따뜻한 곳에서 꿀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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